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안시성 전투]] === 주필산 전투에서 50여 일 정도의 시간이 지난 이후 본격적으로 안시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주필산 전투 이후 당군이 안시성 공격에 착수하는데만 5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연수]]가 당군에 항복한 시점은 645년 6월 23일이지만 당군은 7월 후순에나 안시성에 접근하고 본격적인 안시성 공격은 645년 8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주필산 전투가 벌어진 곳과 안시성의 거리는 10리 남짓으로 길어봤자 반나절 거리이다. 해당 기록의 공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주필산 전투]] 항목 참조]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시성_전투_기록화.png|width=100%]]}}}|| || 안시성 전투 기록화. [[전쟁기념관]] || [[백암성]]을 깬 직후 당태종은 안시성과 건안성 가운데 어느 성을 먼저 공격할지를 의논했다. 연개소문도 못 넘은 성이니 치지 말고 건안성을 먼저 쳐서 자연스럽게 고립시키자는 당태종의 의견에 대하여 [[이세적|이적]]은 [[안시성]]에서의 배후 기습이 우려되니 건안성을 치기 전에 안시성을 제압하는 밑작업이 필요하다 역설하고 관철시킨다. 안시성은 [[당나라군|당군]]에 맞서 굳세게 방어하였으며, 당태종은 크게 진노하여 군사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안시성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전을 하게 되자 당 태종을 따라 출전한 신하들은 "그냥 여기서 시간 낭비 말고 먼저 남쪽의 오골성을 친 다음에 바로 [[평양성]]으로 직공가죠."라고 청했다. 특히 안시성을 구원하러 왔다가 주필산에서 패전한 고구려 항장, 즉, [[고연수]]와 고혜진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는 어서 빨리 당군이 승리해야 자신들의 가족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그 논리는 오골성(烏骨城)의 성주는 늙었으니 쉽게 공략할 수 있을 테고, 오골성을 무너뜨리면 바로 평양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또한 장량의 병력이 있는 비사성에서 오골성까지 이틀이면 당도하므로, 힘을 합치면 오골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10만 명의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이다.[* 《[[신당서]]》에선 해당 병력이 [[안시성]]의 병력이라고 적혀 있으며,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선 해당 병력이 신성 + 건안성의 병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병도의 경우 '《신당서》 기록은 중국애들이 뻥튀기 한 게 아니냐?' 라고 주석을 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한다 "'''라며 반발하자 태종은 결국 안시성 공략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태종 본인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당태종이 '진왕 이세민'으로 불리던 시절, 그의 주요 공훈은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군공을 크게 세운 점이었다. 이때 쌓은 공적을 바탕으로 당나라 건국 이후에도 권력 암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헌데 당태종이 이 시절 가장 즐겨썼던 전법이 적의 공격이 들어오면 우선 수비를 굳게 하여 버티다가 이후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군의 보급로를 우회 타격하여 와해시키는 전법이었다. 본인이 가장 즐겨썼던 전략인 만큼 이를 가장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안시성]]은 낮에 철저히 방비를 하는 한편 밤에는 정예병들로 하여금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게 하여 야습을 일삼았다. 당연히 격퇴되었지만 화가 난 당 태종은 "성을 함락시키면 성안의 모든 사내를 죽여버리겠다."라는 불필요한 말을 하여 오히려 안시성의 저항 의지만 돋워 버렸다.(...) 이러한 일이 당군의 전황에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중국사에서도 [[기겁|저런 소리를 하거나]] [[항우|행보를 벌인 탓에 적군들이 더더욱 끈질기게 버틴 사례는 많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일전쟁]]이나 [[독소전쟁]]에서 [[일본군]]과 [[독일 국방군]]이 보여준 [[삼광작전|대규모]] [[아인자츠그루펜|초토화 작전]]을 보고 [[국부군]]과 [[소련군]]이 격렬하게 저항해 역관광시켜 승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때 당 태종과 함께 출전했던 이도종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토산을 쌓을 것을 명령하여 수개월에 걸쳐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었다. 한때 토산 위에서 나무와 돌을 날려 안시성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으나 폭우로 인하여 토산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 안시성의 성벽 위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이 허물어진 토산으로 진격하여 이를 빼앗아 버렸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토산마저 잃어버리자 당태종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고 결국 철군하였다. 이때 토산의 책임자였던 이도종과 [[부복애]]가 토산을 허술히 관리하여 고구려군에게 빼앗겼다고 하여 그 책임을 묻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당 태종은 이도종이 요동에서 싸울 때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킨 공로가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며 이도종을 용서해 주었다. 반면 부책임자인 부복애는 즉각 처형당했다. 당시 당군과 안시성 성주 간의 전투는 무척 치열하여 당태종이 이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한편 [[안시성주]]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그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음을 슬프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다만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당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안시성주|양만춘]]이라 하고 몇몇 기록에 [[안시성주|양만춘]]이라고 언급되긴 하나 '''1000여 년 후 [[야사(역사)|야사]]'''에서 그렇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